(스크랩) 백두대간

[스크랩] 한북정맥. 9 부 : 왕방지맥

트둥 너굴 2009. 10. 1. 15:43

 

                            왕방지맥 - 39km

                  제 1 구간 : 축석령 - 청산고개(265m)/ 25km

 

축석고개를 지나온 한북정맥이 잠시 숨을 돌리는 278봉은 포천시. 의정부시. 양주시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또한 이곳은 왕방지맥의 분기점으로 우측 어야고개 방향으로 능선을 타고 천보산(423m), 해룡산(660.7m), 왕방산(737.2m), 국사봉(754m), 개미산(453m)을 지나 연천군 청산면 영평천까지 39km를 이어간다.

 

한북정맥과 작별을 하고 북쪽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아카시아와 리기다소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6.25를 지나며 우리의 산은 헐벗은 민둥산으로 변하여 홍수와 산사태의 악순환을 거듭하던 시절이 있었지. 6-70년대 산림녹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녹색의 혁명이 시작되어, 척박한 땅에 자생력이 강한 아카시아와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다. 그 결과 민둥산이 푸른 숲으로 변하고 우리의 산림녹화는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성공을 이룬 것이다.

 

삼동이 시작되는 초겨울의 찬바람 속에 달려가는 발걸음이 빠르게 진행된다. 잡목을 헤치고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면 동녘으로 죽엽산과 용암산 사이로 태양이 솟아오른다. 양주시의 구심점인 양주자이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불곡산과 도락산, 천보산이 병풍을 두른 듯 분지를 외워 싸고, 대장금 촬영지로 유명한 M.B.C 문화방송 갈림길을 지나 심심찮게 나타나는 전망대에서 심호흡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암 봉과 삼각점이 있는 378봉을 지나 분기점을 출발한지 1시간 20여 분만에 어하고개에 도착한다. 회암사에 있는 무학 대사를 만나기 위해 태조 이성계가 넘었다는 고개로, 그 당시 가마꾼들이 어하어하 소리치며 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동쪽의 포천시 소홀읍 이동교리와 서쪽의 양주시 삼숭동의 양주자이 신시가지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350번 지방도로)에는 화물차가 많이 다닌다.

 

좌측으로 부대방향이란 이정목이 있는 삼거리 봉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진행하면 6번 철탑을 지나 지맥을 가로지르는 석문령에 도착한다. 귀율리 아랫마을에서 포천 갈매동을 넘나들던 고갯길로 그 시절 이곳에 돌문이 있어 석문령이라 전해진다. 기록에는 석문령 왼쪽으로 석문성으로 둘러싸인 갈궁지가 있었고 그 아래 병사들이 훈련하던 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좌측에는 지금도 갈증을 풀어주는 천보약수터가 있다. 왕방지맥이 수도권을 사수하는 군부대의 보루인 까닭에 능선에는 군에서 사용하는 삼각점이 유난히도 많이 보인다.

 

53번 삼각점을 지나 343봉(일명 천보산 정상 표지목)에 올라서면 인근 주민들의 산책코스로, 간단한 운동기구와 쉬어가기 편한 벤치도 있고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공원묘지를 지나면 자동차의 소음소리가 들리며 56번 도로가 지나는 회암령에 도착한다. 회암령은 동쪽의 송우리와 서쪽의 동교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도로를 건너는 곳이 커브가 심하여 차량에 주의하여야 한다.

 

서쪽으로 고개 마루를 내려서면 양주군이 시로 승격이 되며 의정부 북부지역이 급속히 발전하고, 천보지맥의 서쪽으로 군사보호지역이 풀리면서 조용하던 산골마을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상전벽해를 실감하게 된다. 산 아래 첫 번째 동네가 김삿갓의 고향 회암동 이다. 김삿갓은 1807년(순조7년) 아버지 김 인근과 어머니 함평이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는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강원도 마대산 기슭에 육신을 누이고 말았으니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연민의 정으로 남아있는 분이다.

 

울울 창창 전나무들이 천년고찰 회암사 입구를 장식하고, 곧이어 너른 벌판에 구획정리를 하듯 펼쳐진 발굴현장. 어느 왕궁보다도 큰 규모에 놀라며 천 년 전의 재정형편으로 과연 가능했을까하는 의구심과 불심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에 입이 딱 벌어진다. 천보산의 양지바른 구릉위에 자리 잡은 회암사 지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인도의 아라난타 사원을 본떠 266칸의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고 보우선사가 거처하던 200여 년간 영화를 누리다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점점 쇠퇴해져 19세기 초에 폐사 되었다고 한다.

 

그 규모는 8구역으로 나누고 8개의 계단으로 석축을 쌓고 30여 채의 가람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지금은 중앙부의 서쪽 편으로 당간의 지주로 보이는 석조기둥 3개가 보존되어 있다. 가장 북쪽에 세워져있는 높이 6m의 부도는 경기도 보물 5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팔각원당형부도로 안정감이 있고 조각기술이 정교하여 조선초기의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회암령 정상에 있는 투바이 휴게소 주차장을 조금 들어가면 좌측으로 임도를 따라 지맥의 들머리가 열린다. 왼쪽으로 회암사지의 발굴현장을 바라보며 진행하면 잡목 사이로 천보산의 정수리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완만한 능선 길. 앙증맞은 암봉을 지나 가파른 비알 길에 로프도 걸려있고, 전망 좋은 정상에 놓여있는 벤치가 길손을 반겨준다. 하지만 정상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없으니 허전한 마음으로 리본하나 걸어놓고 발길을 재촉한다.

 

산에 대한 상당한 경력을 가진 산 꾼들도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해룡산은 강원도나 경상도의 오지에 있는 산도 아니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의 산도 아니다.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으면서도 교통의 사각지대 인데다가 주위의 유명세에 눌려 찾아가는 사람도 없으니 세간의 입방아에서도 멀어져 있는 것이다.

 

칠봉산(506m)의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보며 북쪽으로 진행하다 장림고개 못 미쳐 삼거리 갈림길을 만난다. 이곳은 양주시와 포천시, 동두천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으로 해룡산(660m)이 바라보이는 우측으로 지맥의 종주길이 열리고, 낯익은 산악회의 리본들이 반색을 한다.

 

가파른 비알 길. 미끄러운 왕사토가 앞을 가려도 신바람 나게 달려가는 발걸음을 막을 자 누구더냐? 엄동설한에 소대한이 다 가도록 수북이 쌓인 낙엽위에 먼지만 펄펄 날고, 솔 그늘 쉼터에는 우측으로 하산길이 열리지만 종주 길은 직진이라 그대로 내 달린다. 잠시 후 정성스레 다듬어진 묘 잔등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서면 비포장 임도를 만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비상도로는 오지재 고개까지 7km임을 알려주고 서둘러 주능선으로 올라선다.

 

잠시 후 능선을 하나 넘어서면 비상도로와 다시 만나고, 소나무 숲이 무성한 그늘 속에는 갈참나무 기둥에 128번이라는 표식이 달려있다. 좌측의 비상도로는 산허리를 돌아가며 멀어진다. 건너편의 칠봉산이 삼각형의 첨봉을 이루며 하늘높이 솟아오르고 장림고개의 잘록한 허리에는 억새들의 춤사위로 황금물결을 이루는데, 급경사 비알 길에서 먼저 간 산 꾼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쁜 숨을 몰아쉰다.

 

노송의 그늘 속을 쉬엄쉬엄 올라서면 전망 좋은 헬기장이다. 해룡산 정상이 먼발치에 바라보이고, 정수리에는 우리의 불침번인 통신 탑이 하늘높이 솟아오르고, 육중한 철조망이 가슴을 조여 온다. 사방을 둘러봐도 민간인 접근 금지 경고판이 보이지 않고 부대 쪽으로 등산로가 열려있어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니 군견들이 먼저알고 마구 짖어대는데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철조망주위로 돌아가는 길이 있어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발길을 옮기며 지은 죄도 없으면서 주눅이 든다. 철조망을 끼고 남쪽으로 돌아가면 부대안의 병사들이 본체만체, 자기들 하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긴장감도 풀어지고, 너럭바위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니 송우리와 천보지맥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또한 서남쪽으로 수락산과 도봉산이 하늘 금에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데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속담대로 주머니속의 카메라를 만지 작 거리며 망설이다, 괜한 오해를 살까 두려워 아쉬움 속에 포기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7분 만에 철조망을 통과하고 숲속을 바라보니 꼬리를 감추었던 리본들이 손짓을 한다. 사지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으로 하산 길에 들어서니, 낙엽 속에 얼음이 복병으로 숨어있고, 간벌된 나무들이 즐비하게 쓰러져있어 마음 급한 산 꾼의 앞을 가로막는다. 군부대에서 내려오는 비상도로와 합류하여 도착한 곳은 동두천의 왕방이 마을과 포천의 선단 마을을 오가는 오지재 고개이다. 2차선으로 포장된 고개 마루에는 오가는 차량도 별로 없이 포장마차 하나가 세찬 바람 속에 졸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동동주 한잔으로 갈증을 풀고 왕방산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지재 고개에서 왕방산 까지는 3.3km. 이곳을 들머리로 하는 산악회가 많다보니 포천시에서 등산로를 정비하여 오늘의 산행 길에 처음으로 탄탄대로를 걷는 기분이다. 수많은 리본들의 발자취를 따라 570봉에 올라서면 송우리의 너른 들녘과 대진대학의 캠퍼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737m의 왕방산을 오르는 길은 동두천과 포천이 경계를 이루는 주능선으로 무성한 잡목사이로 시원하게 이어진다. 대진대학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지나 포천의 자작리 갈림길에 이르면 왕방산 1.7km 오지재 고개 1.6km의 이정표가 반겨준다. 낙엽 싸인 육산 길에 제법 큼직큼직한 바위들이 지루함을 달래주며, 지도에 표시된 장기바위를 찾기에 여념이 없지만, 마주치는 사람들도 처음 들어보는 지명인지라 고개를 갸웃갸웃 답답하기 그지없다.

 

헬기장을 지나며 왕방산도 지척이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장기바위 찾기에 여념이 없는데, 우람한 바위하나가 하늘로 치솟아 혼신의 힘을 다해 정수리에 올라선다. 너른 암반위에 낙락장송 3그루 왕방산 제1의 전망대가 예 아닌? 대진대학의 최용림 교수가 초등학교 삼학년의 아들과 함께 너른 암반위에 자리를 잡고 망중한을 즐기는데, 그들은 이곳을 三松亭(삼송정)이라 부르며 시간이 날 때 마다 이곳에 올라 호연지기 기르며 부자의 정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오르는 것 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어려운 얼음 깔린 장기바위. 아슬아슬한 곡예로 바위모서리와 씨름하며 내려서니 모골이 송연하다. 왕방산을 찾은 임무를 완수한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면 너른 공터에 억새가 꽃을 피우는 정수리는 멀리서도 황금빛 춤사위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낙락장송 한그루. 힘들게 올라온 산 꾼들이 달아놓은 리본들이 홍수를 이룬다. 사방팔방 거칠 것이 없는 정수리는 넓디넓은 포천의 분지를 감싸고 한북정맥의 고산준령들이 남으로 달려가며 주금산(814m)과 천마산(812m)을 지나 축령산(886m) 너머로 수락산(637m), 도봉산(740m)이 하늘 금을 잇는다. 서쪽으로 방금 지나온 해룡산(661m)과 그 너머로 칠봉산(506m), 감악산(675m), 마차산(588m), 소요산(586m)이 어깨를 나란히 지평선을 이룬다. 북쪽으로 다음 행선지인 국사봉(754m)이 지척에서 손짓을 하고 종현산(588m)을 이어가는 지맥의 끝자락이 아스라이 가물거린다.

 

왕방산은 972년경 도선국사가 정업을 닦을 때 고려의 광종 임금이 친히 행차한데 유래하여 불리고 있다고 한다. 제법 큼직한 정상석 과 1982년 재설된 포천 23호 삼각점 옆에는 측량의 기준점이 되는 삼각점을 보호하자는 안내문과 전국을 일정한 간격으로 구분하여 심어놓은 16,000개의 삼각점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깊이 울 고개(일명 왕방이 고개)를 향해 내려딛는 발걸음에는 또 다시 겨울의 복병인 빙판길이 앞을 가로 막는다. 아이젠을 착용하고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힘들게 내려선 왕방이 고개는 네거리 갈림길이다. 우측으로 계곡을 따라가면 심곡저수지에 이르고, 오리탕 집들이 성시를 이룬다. 왼쪽으로 내려서면 탑동의 왕방이 마을이다. 지맥의 종주는 국사봉을 바라보며 고압전신주를 통과하고, 화살 표시가 있는 분기 봉을 지나며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된다. 오르고 내리는 발걸음이 천양지차라. 오르고 또 올라도 지친 몸에는 제자리걸음으로 정상은 저만치 멀어만 간다.

 

빤히 올려다 보이는 국사봉 정수리는 경사도가 심한 벼랑길로 바위틈에는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너럭바위도 타고 수직절벽도 걸고 넘어 정상에 올라서면 철갑을 두른 안테나가 푸른 창공위로 솟아있다. 시멘트 헬기장 너른 광장에서 바라보는 산하는 조용히 잠들어 평화롭기 그지없고 국태민안을 비는 제를 지냈다하여 국사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서쪽으로 소요지맥이 시작되는 줄기에는 세목고개와 등줄기를 이어가는 무명봉 들이 백팔 염주와 같이 아련하게 소요산으로 이어진다.

 

철조망을 휘돌아 북쪽으로 내려서는 지맥은 가야할 길이 멀기는 하지만 고도를 낮추며 내려서는 길이라 두려울 것이 없다. 군부대의 진입로를 따라 내려서면 심곡 저수지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나온다. 670봉을 내려서서 완만한 오름길의 작은 공터가 있는 693봉에 올라 오름길은 짧게 내림 길은 길게 400여m의 고도를 낮추며 내려선다. 비알 길에는 참나무들의 시들음 병을 퇴치하기위해 베어놓은 무더기들이 군데군데 쌓여있다.

 

490봉으로 고도를 낮추면 울창한 잣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림 같은 펜션이 눈을 즐겁게 한다. 경기도 북부의 산을 답사하다보면 잣나무 조림지를 유난히 많이 보게 된다. 60년대에는 벌거벗은 산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 수종을 가릴 것 없이 촉성수를 심어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수목 갱신을 한 결과, 밤나무를 비롯한 유실수를 심게 된 것이다.

 

잣나무는 모든 나무 중에 으뜸이요 열매인 잣은 모든 열매 중에 으뜸이라 한다. 잣나무는 우리나라와 만주, 시베리아에서만 나오는 수종으로 양지바른 곳이나 약간 그늘진 곳에서 더 잘 자란다. 생장속도가 빠르며 뿌리가 약간 깊게 내리고 키가 30m에 이르며 줄기의 지름이 1m에 달하는 거목으로 우리나라에 가장 적합한 나무라 할 수 있다.

 

목재는 질이 연하고 결이 곧게 뻗어 가공하기가 쉽다. 가구재 및 도구나 선박을 만드는 데 쓴다. 씨를 잣 또는 송자(松子)라하고 씨눈을 해송자(海松子)라 한다. 씨에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무기질 등이 많아 날로 먹거나 과자로 만들어 먹으며, 술을 빚기도 한다. 기침, 변비, 대변출혈, 중풍초기, 아토피 피부염, 안면신경마비, 신경통, 비만증, 모유부족에 좋으며 잣나무 잎을 말려 가루를 내어 환을 지어 하루 세 번 씩 식사 때 먹으면 마음이 진정되고 간이 튼튼해지고, 양기가 강해지며 흰머리가 검어지고 눈과 귀가 밝아져 장수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유익한 잣나무는 피톤치드의 짙은 향기를 함유한 산소를 무한정 공급하고 있으니 숲속에서 생활을 하면 건강, 특히 아토피스 비부병에 좋다고 한다. 성황당의 고목나무가 있는 낮은 고개를 넘어서면 하늘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오른쪽으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하늘봉(399m)은 심곡 저수지 쪽에서 보면 하늘에 오르는 첨탑처럼 뾰족하게 보이는 산으로 정상에는 군 벙커가 있는 전망이 좋은 산이다. 직진하여 345봉과 373봉을 지나며 살짝 우측으로 내려서서 잣나무 숲을 헤치고 진행하면 294봉에 올라서고 좌측으로 내려서면 칠월리 고개에 도착한다.

 

                  제 2 구간: 칠월리 고개(256m) - 한탄강 / 14km

 

청산 쉼터가 있는 칠월리 고개는 포천시에서 연천군 청산면 초성리를 오가는 368번 지방도로의 갈월1리 정류장이 연계지점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대중교통의 이용이 불편하다. 동두천 터미널과 포천을 오가는 57번 버스(포천상운: 031-534-857)가 유일한 교통수단인데 2시간마다 운행을 하는 관계로 소요산역에서 7시 53분에 출발하는 첫차를 이용해야만 종주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

 

갈월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포천 쪽으로 바라보이는 고개 마루로 올라서기 전, 왼쪽으로 고랭지 채소밭 둔덕에 잘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이곳을 들머리로 하여 둔덕 을 올라서면 잣나무 숲속으로 등로가 열린다. 잠시 후 임도도 끝이 나고 본격적인 종주 길에서 10여 m밖도 보이지 않는 밀림 속을 헤치는 발길에 가시덤불이 앞을 가로막고 우측으로 아도니스 골프장이 있다고 하지만 골퍼들의 외침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또 다시 잣나무 숲속으로 들어서면 진한 솔 향이 진동을 하고 햇볕도 스며들지 못하는 그늘 속에는 포근하게 쌓인 갈비를 밟는 촉감이 부드럽다. 편안한 종주 길에 293봉과 387봉을 어떻게 지나 온지도 모르게 지나고 인적도 없는 호젓한 산길에서 나만의 사색으로 즐거움을 만끽한다. 잡목이 무성한 389.3봉에서 삼각점을 확인하고 내려서는 비알 길은 얼굴을 뒤덮는 거미줄로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늦은 봄이 다가도록 인기척이 없으니 거미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이방인들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난공불락으로 모두가 먹이 감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뭇가지를 꺾어 휘둘러보지만 어찌 그들의 공세를 피할 수 있단 말인가?

 

묵은 산판 길처럼 나무도 듬성듬성하고 잡풀이 무성한 구릉지를 따라가면 묘목단지가 나타나며 전망대가 있는 공터에 도착한다. 서구형으로 날렵하게 지은 2층 전망대를 바라보며 처음에는 어리둥절 하기도하고 신기하기도하여 전망대로 올라서니 별천지가 펼쳐진다. 이렇게도 멋진 전망대가 또 있을까? 사방을 둘러봐도 거칠 것이 없다. 코앞도 안 보이는 밀림 속을 지나오던 답답함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가슴속이 후련하게 터진다.

 

북쪽으로 종현산(588m)과 이어지는 553봉 줄기가 우뚝 솟아있고, 시계 방향으로 창수면의 너른 들녘을 끼고 명성지맥을 이어가는 보장산(555m), 불무산(668m), 관음산(733m)까지. 보장산 뒤편으로 종자산(642m), 지장봉(877m), 고대산(832m)이 하늘 금을 이루고 한북정맥의 고봉들이 엷은 운무 속에 고개를 드러내는 동양화의 진수가 펼쳐진다. 이뿐이랴 지나온 국사봉(754m)과 왕방산(737m), 소요산(532m)의 줄기들도 자태를 뽐내며 하늘 금에는 감악산(675m)과 마차산(588m)까지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보너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주위를 둘러보니 갈월리 간지동에 있는 유 식물원에서 만든 시설물로, 좌측의 산 비알에는 갖가지 야생화들이 단지를 이루고 연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흔들의자 까지 갖추고 있다. 의자가 있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지나온 국사봉과 새목이 고개가 선명하다. 지맥은 우측의 숲속으로 들어서고 잠시 후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삼각점과 한 쪽에 버려진 軍삼각점이 있는 345.4m봉 정상에 오른다.

 

녹슨 철제 경고판을 지나면 묵은 산판 길은 좌측으로 돌아가고 진행방향으로 치고 오르면 본격적으로 오름이 시작된다. 적막강산의 으슥한 숲속에서 멧돼지들의 배설물로 신경이 곤두 서있는 데 두런두런 인기척 소리가 들린다. 死地에서 들려오는 福音소리가 이보다 더 반가울 수가 있을까? 큰 기침 소리로 신호를 보내고 달려가 보니 진지를 정찰하는 군인들이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동행을 한다. 423m봉 오르는 갈림길에서 우측사면으로 돌아가면 553m봉 오름이 시작된다.

 

곧 벌목지역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보이는 종현산을 바라보며 오르는 길은 전망이 좋아 지루하지 않다. 묵은 산판 길을 가로지르며 가파른 오름이 이어지고 교통호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553m봉은 약간의 공터와 시멘트 말뚝 등 낡은 시설이 있다. 이곳은 종현산 분기봉이 아니다. 완만한 안부를 내려서면 거대한 바위들이 가로막고 있는 곳에서 종현산의 부대로 돌아가는 병사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또 다시 나 홀로 산행이 이어진다.

 

개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이제 오늘의 종주 길에서 가장 높은 553봉을 넘어섰으니 힘든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려딛는 발걸음에 뒤돌아보는 종현산은 저만치 물러서고 그만큼 목적지인 전곡시가지가 훨씬 가깝게 보인다. 진지와 교통호가 어지러운 482m봉에 오르면 북쪽으로 보장산 너머로 종자산이 더욱 선명하고 듬성듬성 바위지대가 펼쳐진다.

 

넓은 산판 길을 지나 북서쪽의 평탄한 능선에는 참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방화선을 새로 만드는지 나무 둥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전망 좋은 바위에 올라서면 머리에 송신탑을 이고 있는 감악산이 멀리서도 쉽게 식별을 할 수가 있고 그 옆으로 마차산이 형제처럼 다정하게 바라보인다.

 

방화선이 시작되는 공터에 도착하면 건너편의 개미산으로 이어지는 방화선이 70년대 장발족을 단속하며 바리캉으로 밀어 놓은 것처럼 울창한 수림 속에 경계선을 이룬다. 전망이 터지는 바위에 올라서면 오뉴월의 긴긴 햇살아래 더욱 짙어진 녹음으로 주위의 산과 계곡이 푸른 융단을 깔아 놓은 듯 포근하고, 갖가지 야생화들이 만발한 천상의 화원에는 제 세상을 만난 듯, 벌 나비들이 모여든다.

 

북쪽으로 전곡 시가지 너머로 군남면의 산하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휴전선 넘어 연무사이로 고개를 내민 봉우리가 송악산으로 짐작이 간다. 우측으로는 보장산, 불무산, 종자산, 지장산의 산군들이 겹겹이 주름을 잡고 좌측으로 종현산 줄기 뒤로 감악산이 얼굴을 내민다. 방화선을 지나는 길가에는 바위 틈새를 비집고 산딸기, 산초나무, 억새와 싸리나무가 복병으로 나타나 팔다리를 훌쳐댄다. 더구나 일찍 찾아온 불볕더위의 열기 속에 걸어가는 고초를 뉘 알리오.

 

비실비실 뙤약볕아래 진땀을 흘리며 비알 길 을 올라서면 방화선이 끝나는 봉우리가 개미산(453m)정상이다. 군 참호와 깃대 봉이 있지만 삼각점도 없고 전망도 시원치를 않아 바람결에 스치듯 지나친다. S.T.B 적토대 사물함과 화생방 종이 걸려있는 전망대에 도착하면 연천군의 너른 벌판과 영평천으로 향하는 능선의 조망이 시원하게 터지는 곳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간식을 들며 앞으로 진행할 지점을 점검한다. 북쪽으로 영평천과 한탄강이 합수되는 전곡호로 연결되는 지맥과 우측으로 보장산 기슭의 절경인 창옥병이 선명하게 보인다. 밧줄이 걸린 지대를 내려서면 금방 원형 헬기장이다. 이곳이 북쪽 영평천의 아우라지 방면 마루금과 내가 진행할 신천 쪽 능선이 분기하는 지점이다.

 

왕방지맥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끝자락을 3곳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곳 원형 헬기장에서 북쪽으로 직진을 하면 영평천으로 가는 길이고 전곡호가 있는 곳에서 마감을 하며 많은 리본이 달려있다. 신천 방향은 좌측으로 리본은 없지만 군인들이 훈련하면서 다져진 등산로가 뚜렷하다.

 

축석령에서 발원한 포천천이 백로주가 있는 양문리에서 영평천으로 유입이 되고 백석이 고개에서 발원한 청담천이 동두천에서 신천과 합류하였으니 영평천과 합류하는 한탄강과 신천이 합류하는 청산면 대전리 놀미 마을이 지맥의 끝이라고 보아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운 종주 길에 리본하나 달아매고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가는 긴장감속에 솔푸더기 밑을 조심스레 밟아간다.

 

전곡시가지 방면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의 156.9봉을 목표로 찾아가는 길에는 공터를 이룬 헬기장이 나오고 O.T.S 적토대의 낡은 나무 팻말이 보이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선명한 길을 따라가면 영평천과 평행으로 가는 능선이다. 지맥은 좌측으로 내려서야 하고 역시 길이 뚜렷하고 전면으로 봉우리가 보인다. 솔푸더기를 헤치며 올라선 곳이 軍 삼각점이 설치된 조망 봉우리다. 민둥봉의 푸석 바위에 2개의 삼각점이 있고 앞으로 진행할 마루금이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가 지맥을 답사하다보면 말미에 가서 낮은 구릉이 수십 갈래로 나누어지는 지점에서 잠시라도 방심을 하다보면 옆길로 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종착지점이 지근거리에 있으므로 이리저리 돌아가더라도 목적지에 도착은 하지만 능선을 이어가는 계획에서 이탈하면 그 동안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고 허탈감속에 빠지고 만다. 해서 무성한 숲속에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2개의 삼각점이 있는 봉에서 좌측의 계곡으로 파란 지붕의 군부대가 있는 곳이라 우측으로 겨냥하여 급하게 내려서면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를 따라서 좌측으로 진행하다, 파란지붕이 있는 군부대로 휘어져 내리는 능선에서, 우측의 낡은 나무계단을 딛고 올라서면 주능선으로 연결된다. 화생방 땡땡이종과 빗자루를 거꾸로 세워놓은 봉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우측의 전신주를 지나 내려서서 푸른 지붕이 있는 계곡에서 올라오는 잘록이 고개 마루에서 주능선으로 올라 5분후 원형 헬기장이 나타난다.

 

이곳의 능선이 군부대의 화생방 교육장인 듯 땡땡이 종이 수시로 나타난다. 공터에 올라서면 “철원460의 삼각점이 설치된 156.9m봉이다. 좌측아래 파란지붕의 공장들과 개짓는 소리를 들으며 서쪽으로 교통호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낡은 軍삼각점이 있는 지점에서 다시 방향이 바뀐다.

 

북쪽으로 잠시 내려서면 낡은 쇠말뚝의 철조망들이 보이고 넓은 산판 길에서 희미한 소로를 따라 서쪽으로 오르면 전곡67번 송전탑을 지나 붉은 쇠 종이 나타난다. 저 아래 상당한 높이의 절개지와 도로가 보이면서 절개지 우측으로 교통호를 따라서 내려서면 백의리와 초성리를 오가는 322번 지방도로의 확장공사구간으로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다.

 

서쪽의 고개 꼭대기를 전면으로 치고 오르면 우측 아래로 민가들이 가깝게 보이고 잠시 후 68번 송전탑이다. 낮은 고개를 올라서면 孺人 全州 李氏 무덤이 있고, 무덤 위의 봉우리가 북쪽 장탄리 쪽으로 이어지는 분기 봉이다. 152m봉을 지나 거저울 까지 이어지는 또 하나의 능선을 마루금의 종착지로 잡는 이들이 있지만 이 코스는 합수 점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고, 지맥의 가장 긴 구간을 답사한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분기봉에서 좌측으로 능선을 따르면 무덤지대가 펼쳐진다. 무덤들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서면 임도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송전탑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이어가는 마루금 자체가 軍 임도로 연결되어 아주 편안하게 진행한다. 임도를 따라가며 남쪽으로 바라보면 종현산과 지나온 능선들이 시원스럽게 보이며 그 먼 길을 걸어왔다는 자부심에 피로감도 잊는다.

 

각개전투 1572부대 표시와 시멘트 단상을 보며 내려서면 임도 삼거리에 이르고 좌측으로 작은 봉우리가 149.3m봉이지만, 잡목과 넝쿨들이 무성해서 삼각점을 찾지 못한다. 서운한 마음으로 임도를 따라 진행하면 덕전96번 송전탑이 나타나고 좌측 아래로 놀미 마을의 공장들이 내려다보인다.

 

계속해서 임도를 따르면 폐건물을 지나고 우측으로 넘어가는 임도 갈림길에서 남서쪽으로 휘어지며 대전리 산성이 나타난다. 대전리 성터는 퇴뫼식 석축산성으로 성벽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울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675년 이근행이 이끄는 20만 당병을 물리친 신라의 매초성터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있다.

 

131m인 산성의 정상에 올라서면 전곡시가지를 흐르는 한탄강이 도시를 감싸는 해자와 같이 절경을 이루고 지적 삼각점과 대전리 주민들이 매년 제사지내는 산신석이 자리 잡고 있다. 성의 정상에는 정자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깃대봉과 화생방 땡땡이 종이 걸려있어 이래저래 오늘 하루는 땡땡이 종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발아래로 흐르는 한탄강을 바라보며 오늘의 임무도 무사히 완수했다는 자부심으로 임도를 따라 내려오는 길목에는 놀미 마을 쪽으로 攻擊路 표석이 있고 마을로 내려서며 한탄교에 도착하면 한탄강과 신천의 두 물이 합류하는 장관을 볼 수 있는데 오염된 하천에서 악취가 진동을 하니 아름다운 왕방지맥을 휘돌아온 물이 언제나 청정수로 변할지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소요지맥 : 12.9km

 

나에게는 너무도 행복한 시간 속에 하루하루가 저문다. 그렇다고 집안에 경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복권에 당첨된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평범한 시간들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백두대간을 탈고하여 계간지인 時와山에 연재를 하고, 한북정맥을 집필하며 차레차례로 지맥을 순례하는 즐거움은 건강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65세의 나이에 15km가 넘는 산을 누비며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특권이다.

 

왕방지맥의 끝자락인 놀미 마을을 다녀 온지 일주일. 건너편의 소요산을 품고 있는 소요지맥을 어찌 그대로 지나칠 수가 있단 말인가? 소요산은 여러 차례 다녀온 곳이라 익숙하지만, 지맥의 종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라 험한 산길을 마다않고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요지맥은 왕방지맥의 주봉인 국사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 신천과 열 두개울이 합류하는 신천교까지 13km에 이르는 지맥이다.

 

국사봉에 올라서면 쇠목고개를 중심으로 북쪽의 금동리 와 남쪽의 왕방이 마을이 깊은 계곡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전란을 피해 숨어들기 좋은 십승지지에 버금가는 하늘아래 첫 동네. 동두천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마을이지만 깊은 산자락에 숨어있는 곳이라 이런 궁벽한 곳에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지맥의 들머리인 새목 고개를 찾아가는 교통편은 공기 좋고 물 맑은 심심산골에 자리 잡은 노인요양 병원을 오가는 60번 버스가 있어 접근이 용이하다.

 

탑동마을에서도 버스로 10여 분간 산길을 돌고 돌아 도착한 노인병원은 아무리 위중한 환자라도 완치될 수 있는 청정지역의 양지바른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병원의 앞마당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새목 고개는 나는 새도 넘지 못할 험준한 준령을 절개하여 V형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된 비알 길에 포장된 도로를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겁고 등줄기에서 진땀이 흐른다.

 

왼쪽으로 공동묘지로 조성된 예미원이 있지만 찾는 이가 별로 없는 탓에 한산하기 그지없다. 중간에 왕방산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가파른 경사도에 울창한 삼림으로 발을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보이지 않으니, 산행도 못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고개 길을 중턱쯤 올라서면 남쪽으로 해룡산과 포천으로 넘어가는 오지재 고개가 멋진 V 라인을 그린다. 40여 분만에 고개 마루에 도착하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호된 신고식을 하고 보니 건너편의 국사봉으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쪽의 수위봉(648.9m)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수십 길 절개지에 발을 들여 밀 틈새 하나 없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는가? 고개 마루를 지나며 왼쪽으로 빛바랜 리본 하나가 바람결에 나부낀다. 구세주를 만난 기쁨으로 달려가니 무성한 억새사이로 희미한 오솔길이 열린다.

 

진입로를 제대로 확인한다는 것은 절반 이상의 성공이라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힘이 솟는다. 500만 명의 등산인구로 수도권의 산들이 몸살을 앓고 있지만 지맥의 종주를 고집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주위에서 무모한 도전이라는 핀잔 속에서도 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함은 자신만의 사명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산의 체계를 이해하고 맥을 이어간다는 숭고한 신념과 집념의 결정체로 고독한 승부가 따라야 한다.

 

하루에 20km이상의 종주와 10시간이상의 산행을 할 수 있는 강건한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다음으로 산의 지형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과 체계적인 독도법을 숙지하여 악천후 속에서도 길을 잃는 일이 없도록 전문지식을 습득해야한다. 또한 산행하기 전에는 산의 특징과 탈출로를 숙지하여 만일에 대비하고 기록과 사진 찍는 습관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종주에는 단독으로 산행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소한 준비물이라도 꼼꼼하게 챙기는 습관을 길러야한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특히 여름철에는 숲이 무성하고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야생동물들의 기습에도 대비하여야 한다. 짐승들도 사람을 무서워하기는 마찬가지라 배낭에 딸랑이를 달아 인기척을 내어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한다. 뱀이 많은 바위지대를 지날 때는 뱀이 싫어하는 백반을 소지하여 접근을 막는 방법도 있다. 특히 벌의 공격에는 특별한 예방이 없지만 등산로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마음이 심란할 때는 호각을 불어 자신의 위축된 마음을 추 수리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산행을 하며 가장 긴장되는 것이 멧돼지들과의 조우이다. 산림녹화의 성공으로 숲이 무성하여 야생동물들의 개체수가 늘어나 정맥이나 지맥과 같이 사람의 왕래가 적은 곳에서는 멧돼지들의 흔적을 흔히 볼 수가 있다.

 

몸길이 1~2m에 몸무게가 40~200kg이나 되는 놈들이 십여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닌다는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하다. 참고로 멧돼지의 특징을 살펴보면 예리한 송곳니가 있는데 아래턱에 있는 송곳니는 일생 동안 계속 자라 큰 엄니가 된다. 엄니는 마치 칼날 같이 날카로워 적을 공격하거나 위험에 부닥쳤을 때 긴요한 무기가 된다. 코뼈는 가늘고 길며 잘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땅 속의 먹이를 파내는 데도 적합하다.

 

멧돼지는 깊은 산, 활엽수가 우거진 숲 속에서 살기를 좋아하며 눈이 많고 추위가 심해지면 야산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보금자리는 양지바른 곳에 땅을 파고 앞쪽이 트이게 입구를 파서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 긴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고 속에 있는 감자·고구마·나무뿌리, 뿐만 아니라 토끼· 들쥐 등 작은 짐승에서 물고기나 동물의 사체를 먹는 등 잡식성이다.

 

멧돼지가 가장 난폭할 때는 모성애의 보호본능으로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시기로 이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번식기는 1년에 한 번이고, 임신기간은 4개월에 3-8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태어난 새끼는 곧바로 눈을 뜨고 걸어 다닐 수 있으며, 태어난 지 3개월이면 젖을 뗀다. 새끼의 엷은 갈색 몸에는 노란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수평 방향으로 몇 개 있어 보호색이 되고, 이 줄무늬는 영구치가 나오는 생후 5개월 무렵 없어져서 어미와 같은 센털로 변한다.

 

어느덧 648.9m의 수위봉 정상에 올라선다. 무성한 잡목 속에 커다란 광고판이 자리를 차지하고 꽁꽁 숨어버린 삼각점 찾기를 포기한다. 갈참나무 밑 둥에 매단 비닐봉투속의 정상표지는 비바람에 바랜지 오래되어 판독하기도 어렵다. 동쪽으로 국사봉 정상은 조국을 지키는 파수군의 늠름한 모습으로 철통같은 요새지가 마음 든든하다. 인적이 별로 없는 무성한 숲속에는 멧돼지들의 아지트인양 푸짐한 배설물과 함께 이른 봄 논을 갈이를 한 것보다 더욱 푸짐하게 낙엽을 뒤집어 놓았으니 오금이 제대로 떨어질 리가 있는가?

 

걸음아! 날 살려라. 종종 걸음을 치며 곤두박질치는 비알 길을 단숨에 내려선다. 서쪽으로 광암동과 걸산동을 갈라치는 능선하나가 길게 꼬리를 물고 내달리는 와중에 동두천 M.T.B 회원들이 즐겨 찾는 임도와 만난다. 주위에 펼쳐지는 소요산의 줄기와 종현산의 모습도 보인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임도와 작별을 하고 다시 숲속으로 들어서면 완만한 주능선이 이어지고 병사들이 훈련하며 다져놓은 산길덕분에 편안하게 진행한다.

 

등산이 다른 운동에 비해 좋은 점이 많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첫째 유산소운동으로 경쟁 없이 자신의 페이스에 알맞게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산책 정도라면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가능하다. 때문에 산을 찾는 순간부터 안정감과 신선함을 느끼는 것은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의 정기를 받으므로 운동의 효과를 더욱 높여 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숲이라는 환경은 도시생활에 찌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다. 식물이 만들어낸 정화된 산소와 음이온이 가득한 공기, 그리고 피톤치드와 같은 갖가지 물질이 우리의 몸속에 축적된 노폐물을 걸러주고, 도시민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아토피스 피부병에 특효라는 사실만으로도 산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측으로는 금동리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좌측으로는 처음 들어보는 걸산동이 계곡 속에 자라잡고, 소요산 의상봉 줄기가 점점 가까워 온다. 그늘 속을 걸어가는 종주길이지만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서는 체력의 한계가 있는지라 너른 공터에서 막걸리로 갈증을 풀며 휴식을 한다.

 

이제 새목 고개에서 감투봉(535m)까지 절반 거리에 이른다. 불탄 자리에는 억새와 싸리 밭이 펼쳐지고 동두천 시내가 그림같이 내려다보인다. 화초지초 흐드러진 그늘 속에는 군부대 삼각점이 있고 잠시 후 금동리와 걸산동을 오가는 고개 마루를 지나면 철조망이 가로막는다.

 

바위지대 벼랑길을 타고 이어지는 철조망은 사격장의 경고판을 바라보며 가슴이 서늘하다. 1km 남짓 철조망과 동행을 하다 마지막으로 철조망을 넘어서며 사격장과 작별을 하고 소요산의 주능선인 칼바위능선 오름길이 시작된다. 만고풍상의 노송이 어우러진 칼바위 능선의 매력은 날카로운 암봉을 넘나드는 것. 지친 몸에도 스릴 넘치는 구간을 올라서면 상백운대. 내친김에 감투봉의 쉼터에서 점심상을 차린다.

 

허기진 몸에도 생기가 돌고, 솔향기 그윽한 노송의 휘어진 가지사이로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한 조각 구름이 흘러가는 곳. 경기제일의 금강으로 가을의 단풍이 절경인 소요산. 3일간의 짧은 사랑으로 영원히 이별을 하고만 원효와 요석공주 못다 한 사랑의 애틋한 전설하나를 들춰본다.

 

신라 무열왕 김춘추의 딸인 요석공주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다. 요석을 짝사랑하여 경주 거리를 돌아다니며 흠모의 노래를 부르던 승려 원효는 남천 월정교에서 뛰어내려 옷을 몽땅 적신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요석 궁에 몰래 들어가 옷을 말리며 꿈같은 3일을 보낸다.

 

승려의 신분인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애절한 두 사람의 운명은 요석과의 염문으로 궁을 빠져나와 소요산으로 들어가 버린 파계승 원효를 그리며 아들 설총을 낳아 홀로 기르며 오매불망 그리움에 눈물짓는 요석공주가 세 살배기 어린 설총을 데리고 천리 먼 길 소요산으로 원효를 찾아간다. 하지만 소요산의 신선이 되어 세속으로 갈수 없다는 원효의 말에 자재암 일주문 밖에 움막을 짓고 원효를 만나기 위해 애타게 기도를 한다.

 

원효의 심오한 불법을 깨닫고 쓸쓸히 소요산을 떠나는 요석공주의 애닲은 심정을 뉘 알리요. 애잔한 전설을 간직한 소요산 곳곳에 원효와 요석의 못 다한 사랑의 흔적들이 있으니, 자재암과 원효폭포, 원효대, 나한대, 공주봉, 금송굴이라

 

좌측으로 간담이 서늘한 폐광터의 벼랑 끝을 돌아가는 길목에는 로프가 매여 있다. 신북 온천과 상봉암동을 넘나들던 이시랑 고개로 내려서면 무심한 세월따라 옛사람들의 발자취도 가시덤불속으로 묻혀버리고 다이너스티 골프장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번대산(450봉)을 지나 한동안 그린을 끼고 돌며 골프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임도와 만나 초성리 까지 이어지고 법수동의 신천과 열두 개울이 만나는 수동교에서 지맥의 종주도 종지부를 찍는다.

출처 : 풍운아
글쓴이 : 풍운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