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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북정맥. 10부 : 감악지맥

트둥 너굴 2009. 10. 1. 15:43

 

                           감악지맥 : 42km

 

             제1구간: 한강봉(474m) - 설머치 고개 / 22.8km

 

감악지맥은 한북정맥이 오산삼거리를 지나 한강봉(474m)을 솟구친 다음 북서쪽으로 분기하여 느르미고개 - 은봉산(379.8m) - 소사고개 - 팔일봉 갈림길 - 노아산 갈림길 - 개너미고개 - 새우개고개 - 수르네미고개 - 무건리고개 - 설머치고개 - 감악산(675m) - 간패고개 - 마차산(588m)을 거쳐 431m봉 직전의 분기점에서 우측능선으로 구정산(412m)을 지나 한탄강에서 맥을 다하는 약 42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소요지맥을 답사한지 보름 만에 감악지맥의 종주 길에 나선다. 지구의 온난화로 더위가 일찍 찾아와 삼십도를 넘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장거리 산행에는 무리가 따를 것을 염려하여 집에서 가까운 곳을 택하게 되었다. 집 앞의 버스정류장에서 5번 버스를 이용하면 한강봉의 북쪽 기슭에 있는 복지리까지 수월하게 진입을 할 수가 있다.

 

복지리 버스 정류장에서 동화아파트 골목을 빠져 나오면 산기슭에 주말농장의 채마밭이 있고 임도를 따라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마을 주민들의 산책 코스를 따라 느르미 고개로 올라선다. 산불조심을 수없이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건만 순간의 부주의로 수십 년 된 나무들이 숯 검뎅이로 변하고 말았으니 검게 그을린 밑 둥을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를 않다. 동쪽으로 15분 만에 올라선 봉우리가 한강봉으로 감악 지맥의 분기점이 된다.

 

한강이 보인다고 하여 한강봉이라고 하는 정상에는 이정표와 깃대가 있고 1구간에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이 압권이다. 되돌아 내려선 느르미고개는 양주시 백석읍 신지마을에서 기산리를 넘나드는 곳으로 널찍한 임도를 따르면 고압송전탑이 있고 종합전술훈련장의 철문을 통과하면 곧바로 은봉산(397m) 정상이다.

 

양주 문화원의 문헌에 의하면 은(銀)이 나는 곳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으로 일제 때 이곳에서 은을 채굴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은봉산 중턱에는 당시에 은을 채굴했던 굴이 남아있다고 한다. 또한, 옛날 남씨 일가가 장사를 지내는데, 어느 지관이 "이곳을 파서 바위돌이 나오면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고 묻으라"고 했지만 자손들은 시신을 돌 위에 올려놓고서 도저히 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위 돌을 들어내었더니 부엉이 3마리가 날아갔다고 한다. 그 후로 자손들의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며 봉황이 숨었다가 날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은봉산에서 군사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소사고개에 이른다. 고개 마루를 지키는 방호벽. 수도 서울을 사수하는 불침번으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부산물이다. 기산저수지와 말머리고개에서 백석면으로 넘나드는 39번 도로가 지나는 소사고개에서 된 비알을 치고 오르면 산불 감시초소가 나온다. 잠시 후 팔일봉갈림길에 이른다. 서쪽으로 빗겨있는 팔일봉은 마장저수지와 친교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정상석을 대신하는 헬기장으로 8개의 봉우리가 맥을 이어가는 곳으로 해를 맞이하는 산이라 하여 팔일봉(八日峰 463m)으로 부르고 있다고 전해진다.

 

되돌아 나온 갈림길에서 급경사를 내려서면 하우고개에 이른다. 하필이면 군용차가 고개 마루에 대기하고 전차훈련장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제지로 맥이 풀린다. 하지만 통사정으로 겨우 진입에 성공을 하고 산등성이에 올라선다. 전차가 다니는 너른 도로는 전날 내린 빗물로 진흙탕으로 변하여 수라장을 이룬다. 천신만고 끝에 너른 헬기장에 올라서니 서쪽으로 노아산이 자리 잡고 있다. 월암산(月岩山)이라고도 하는 노아산은 바위가 많아 달빛에 아름다운 빛 이 반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맥에서 비껴나 있고 정상에 군부대가 있는 탓에 건너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오른쪽으로 지맥을 내려서면 그림 같은 연곡리가 펼쳐지고 산등성이에는 가족묘지가 많이 보인다.

 

백석읍 연곡리와 광적면 비암리를 넘나드는 365번 지방도로인 게너미고개에 도착한다. 2차선 포장도로인 이 고개의 연곡리 쪽 기슭에 해유령 전적비가 있다. 전적비에 의하면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파죽지세로 올라오던 일본군을 지상전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라고 한다. 부원수 신각장군이 일본군 70여명의 수급을 벤 전과를 두려워 한 도원수 김명원이 신각장군을 모함하여 부원수 신각을 죽인 슬픈 역사를 바로 잡아 1976년 11월 30일 전적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해유령의 전설 - 옛날 노고산에 노고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노고할미가 다리 한쪽은 노고산에 걸치고 다른 한쪽은 광적면 도락산에 걸친 후 황새등 고개 요강 바위에 오줌을 쌌다고 한다. 이때 요강 바위가 넘치면서 인근 개울에 뜨거운 오줌이 흐르고 이때 개울에 살던 게들이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이 고개를 넘어 비암리와 파주시 발랑리쪽으로 갔다고 한다. 그 후로 광적면 연곡리 일대에는 민물게가 보이지 않고 비암리와 발랑리에서만 민물게가 있다고 한다. 게가 넘어간 고개라 하여 게너미고개라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

 

당진한씨 묘소를 필두로 가족묘지가 즐비한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산딸기와 청초한 나리꽃이 고개를 내밀고 군 작전도로를 따라 편안하게 진행을 한다. 잣나무가 가평의 특산물이라면 양주에는 밤나무가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흐드러진 밤꽃의 향기 속에 발걸음이 빨라지고, 어느덧 삼현 터널(새우개 고개)위로 올라선다. 마을 이름을 안새우개라 하는데 마을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우골고개(점말고개), 언굴고개(갈곡령), 자작고개(화암령)를 넘어야 한다는 데서 유래한다.

 

삼현터널위로 잣나무가 무성한 비알 길을 치고 오르면 우고리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에는 운동시설과 벤치가 있다. 반가운 마음에 배낭을 풀어보지만 날 파리들의 극성으로 서둘러 자리를 뜨고 만다. 감악 지맥은 양주시의 서쪽 경계를 따르게 되는데, 수도권을 지키는 군부대의 시설물과 비상도로가 산등성이를 따라 시원하게 펼쳐진다.

 

어느 삼림욕장에 들어온 듯, 완만한 능성위로 비상도로를 따라 진행을 하면 노고산 들머리 쪽으로 리본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아직까지 지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위험하다는 안내문을 보며 갈등이 인다. 잠시 망설인 끝에 무모한 짓은 객기일 뿐이라는 판단으로 좌측의 편안한 임도를 따르기로 한다. 이곳 노고산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통과지역이다.

 

그 당시 26사단 75연대 본부중대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통신보급 병으로 내무반의 서열도 중고참으로 고된 신병 생활을 면하고 편안한 병영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천 병력과도 같은 사건이, 우리 사단의 관할 지역으로 지나갔다는 이유로 허술한 방어의 책임을 물어 초비상 사태 속에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연속되고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월남전에 지원을 하여 18개월간 월남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고초를 겪게 된 것이다.

 

아련한 추억을 되씹으며 임도를 따라가노라면 지뢰지대의 경고문이 긴장감을 고조 시킨다. 노고산의 허리를 돌아서면 정상에 있는 군부대의 진입로와 만난다. 하지만 철옹성처럼 견고한 진지로 접근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동쪽으로 뻗어가는 지맥을 멀건이 바라보며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56번 국도를 향해 뜨거운 열기 속에 고된 행군이 시작된다. 중간에 미화레미콘 공장을 지나서도 10여분을 더 내려간 뒤에야 국도를 만날 수 있다.

 

의정부에서 법원리를 거쳐 문산으로 가는 길목이지만 마을하나 없이 을씨년스러운 방호벽이 앞길을 가로막고 진땀을 흘리며 올라선 고개 마루는 적성과 의정부로 갈라지는 삼거리 길이다.

 

이곳에서 의정부 쪽으로 한참을 더 간 후에야 양주군과 파주군의 경계인 수루레미 고개에 도착한다. 해태상이 있는 왼쪽으로 반가운 리본들이 나뭇가지에 나부낀다. 지뢰지대를 피해 돌아온 십리길이 멀기만 하고 나무 그늘 밑으로 기어들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대지는 용광로가 따로 없다. 소가 수레를 끌고 넘었다는 이 고개는 그 옛날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넘던 곳으로 김 신조가 개성을 출발하여 고랑포(경순왕릉)를 거쳐 파평산과 법원리의 삼봉산(비학산) 줄기를 따라 이곳에 이르러 노고산으로 진입을 했다고 한다.

 

양주시 광적면과 파주시 법원리의 경계를 따라 북쪽으로 진행하는 지맥은 비상도로와 동행을 한다. 1시간이 넘도록 답답하게 이어지는 숲의 터널 속에서 가뭄속의 단비처럼 반가운 바위 봉 하나가 나타난다.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다. 화려한 조명을 받는 무대 위에서 수많은 청중들로 가득 찬 객석을 바라보는 기분이 이럴까?

 

서쪽으로 탱크 훈련장너머로 학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비학산이 있고 남쪽으로 방금 지나온 지맥의 끝자락에 불곡산과 도봉산의 연릉이 운무 속에 희미한 자태를 드러낸다. 동쪽으로 감악산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신산리의 기름진 들녘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파주 쪽에서 바라보면 범의 형상을 하고 있어 범 바위 봉이라고 부른다고 하지 않는가?

 

열기속의 포장도로 무건리 고개 까지 이어지는 비상도로를 따라 무료하기 짝이 없고, 그나마 길옆의 나리꽃을 위안삼아 깃대봉을 지나면 탱크 진지가 나타난다. 곧이어 무건리 고개 마루에 도착하면 삼거리 갈림길이다. 잘록한 분지에 비닐하우스가 있다. 바닥을 드러낸 식수통을 바라보다 갈증을 참지 못하고 식수 구걸을 하고 보니 큰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흡족하다. 무건리 고개는 파주시의 무건리에서 양주시의 신산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일명 신산리 고개라 부른다.

 

이곳에서 우측의 넓은 임도는 감골로 내려서는 길이고 지맥은 좌측의 임도를 따라 북진을 한다. 365봉에 올라서면 감악산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이 근처에는 천연기념물 286호인 물푸레나무 자생지가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북진하던 지맥이 동쪽으로 선회하여 설마치 고개로 향한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걷는 걸음도 20여 km가 넘는 먼 길에 파김치가 되어 흐느적거리고 사명감도 자신감도 먼발치로 흘려버리고 구세주 같은 설마치 고개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제 2 구간 : 설머치고개 - 한탄강 / 19km

 

설머치 고개: 처갓집이 있는 적성을 수시로 넘나드는 고개라 굽이굽이마다 정감이 가는 곳이고, 감악산 유원지가 있는 설마리에는 영국군 묘지가 있다.

 

1951년 4월25일 밤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235고지.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셔부대가 사흘 전 시작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일곱 차례나 격퇴하고 나서 대대장 카네 중령은 말했다. "각자 알아서 후퇴하라. 나는 부상자들과 남겠다." 중공군 4만 여명과 맞서 싸운 이 전투에서 영국군 50명이 전사하고 526명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56명만이 탈출했다는 기록을 보며,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의 치열했던 당시를 회고 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의정부에서 적성을 오가는 25번 버스를 이용하여 인심 좋은 기사 덕분에 고개 마루에 내려서며 산행이 시작된다. 감악산 자락을 파고드는 349번 도로의 구비 길에 직강공사가 한창이고 급경사 절 개지를 우회하여 올라서면 편안한 지맥길이 열린다. 울창한 수림속이지만 병사들의 훈련장을 지나는 관계로 등산로가 뚜렷하다. 우측으로 신암저수지와 좌측의 사기막 골의 경계를 따라 진행하면 부도골과 사기막을 오가는 임도를 만나게 된다. 감악산의 임꺽정봉을 바라보며 직진을 하면 군사 훈련장이 전개되고 눈물 콧물 흘리던 추억의 화생방 가스실을 지나며 본격적인 암릉 길이 펼쳐진다.

 

악귀봉 오르는 길엔 로프도 걸려있고, 수십 길 벼랑을 기어오르면 감악산이 경기의 오악(개성의 송악산, 과천의 관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이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악귀봉에서 부터 얼굴바위와 장군봉, 임꺽정 봉을 오르는 능선이 감악산의 백미다. 천태만상으로 빗어놓은 조물주의 걸작 품으로 임꺽정 봉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사방 백리길이 시야에 가득하다. 전에는 안전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위험한 구간이 많았으나 암릉의 구간마다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안전하게 산행을 즐길 수가 있다.

 

임꺽정봉 굴: 이름만 들어도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의적 임꺽정이 험준한 산세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는 설과 고구려를 치러온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가 주둔하던 곳이라 전해진다. 임꺽정봉에서 북쪽으로 700여 m 떨어진 감악지맥의 주봉인 정상에는 너른 공터에 헬기장이 있고 군부대와 송신철탑, 정상석과 대왕비가 서있다.

 

정상의 감악산 비: 향토유적 8호로 지정된 삼국시대 고비(古碑,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산 25번지, 높이 170cm)가 서 있는데, 글자가 없다고 하여 일명 '몰자비, 빗돌 대왕비 또는 설인귀비'라고도 한다. 이 비석의 글자는 마멸되어 있는데, 그 생김새가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와 비슷하여 진흥왕 순수비라는 설도 있고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설인귀비라는 설도 있다.

 

정상에서 보는 조망 또한 일품으로 임진강 너머로 북한의 장단 땅이 지척이요. 개성의 송악산도 아스라이 바라보인다. 동쪽으로 마차산으로 향하는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북녘 땅을 굽어보는 성모마리아상 앞에서 경건한 기도와 성모송을 낭송한다. 잠시 후 아찔하게 현기증이 이는 병풍바위에 올라선다. 이곳 에서 보는 임꺽정봉의 모습이 다른 것은 천의 얼굴을 가졌기에.... 감악산 정상이 양주시, 파주시, 연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연천군에서 군 경계를 따라 등산로를 정비하여 편안하고 수월하게 진행이 된다.

 

간패 고개로 향하는 길목에는 좌측으로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카페가 있는 듯, 널찍한 임도가 있지만 내려서면 알바를 하는 곳으로, 주능선을 따라 가파른 비알 길을 내려선다. 건너편의 마차산이 지척에서손짓하고 연천군에서 세운 이정표는 북쪽으로 이어진다. 청솔가지와 잡목으로 시야를 가리기에 주능선에서 이탈하기 쉬운 지점으로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늘목리와 황방리의 경계선을 따라 진행을 하면 십여 분만에 간패고개에 도착한다. 간패고개는 양주시 은현면과 연천군 전곡읍의 경계를 이루는 368번 지방 도로이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南面) 황방리(篁芳里)에는 고려 말의 충신 남을진(南乙珍)이 은거하던 굴을 남선굴이라 하는데,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첨지(僉知)로 있던 남을진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인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의 태조(太祖)는 등극 후 두문동 72인을 회유하여 기용하려 했으나 이들이 결사적으로 불응하자 두문동을 불살라버렸다. 그러자 남을진은 이 동굴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내니 태조는 다시 사천백(沙川伯)이라는 벼슬을 주어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받지 않고 생을 마쳤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지조를 숭모하여 그가 은거하던 동굴을 남선굴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동굴 위에는 남선굴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고 한다.

 

간패고개에서 동쪽으로 경사가 심한 포장도로가 있어 군부대 정문으로 생각을 하고 긴장을 하며 접근을 하니 너른 공터에 기족 묘지가 있다. 한 여름의 무성한 가시덤불을 헤집고 참나무 군락지로 들어서니 오솔길이 나타나고 백두크럽의 리본이 반겨준다. 제대로 진입을 했다는 안도감으로 그루터기 밑 둥에 걸터앉아 막걸리 한잔으로 휴식을 하고 마루금을 헤쳐 나간다.

 

동두천시와 연천군, 양주시의 3개 시군이 경계를 이루는 마루 금에는 동두천 동광교 6.0km 마차산 정상2.8km 전곡 간파리의 이정표가 서있다. 동두천시 경계를 답사하는 종주코스인 듯 일련사에서 시작된 종주길이 44.3km라 적고 있다. 잠시 후 간파리 전곡 초등 분교와 동두천의 안흥동을 잇는 늦은 고개에 도착하면 마차산 정상3.8km 동두천의 동광교 6.3km의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 다솜농장 이정표가 있는 곳 까지는 임도와 동행을 하는데 좌측으로 채석장에서 나오는 소음과 분진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다솜농장 입구에서 왼쪽의 마루금으로 올라서면 호젓한 산길이 열린다. 제법 가파른 비알 길 을 치고 오르면 헬기장이다. 이곳부터 마차산 정상까지는 스릴 넘치는 암릉 구간으로 바위와 노송은 동양화의 진수가 아닌가? 바위틈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든든한 뿌리를 박고 만고풍상의 시련을 이겨내며 마디마다 휘어지고 구부러진 모습에서 강직함과 유연성을 겸비하였으니 우리네 산 꾼들에게 안겨주는 높은 기상이요 포근한 안식처이다.

 

아직도 종주의 길은 멀었지만 마지막으로 피워 올리는 불꽃의 향연은 마차산의 정상에서 일어난다. 높은 누대위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펼쳐지는 소요산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이다. 비록 마차산은 소요산의 위세에 눌려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숨은 뜻을 어찌 알리요. 우리의 고(古)종교에서는 그 고장의 높고 영험한 산을 골라 하느님과 선조의 신령을 위하였으니 예가 바로 삼신할머니(麻姑.마고)께서 주재 하시는 갈뫼(磨岳. 마악)이다.

 

다산(多産)과 풍요를 베푸시고 하룻밤 사이에 앞쪽의 석성(石城)을 쌓으시기도 하신 삼신할머니는 세상만사를 어우르시는 여가의 수리바위에 앉으셔서 옥비녀와 구슬을 갈고 매무새를 고치셨다는 전설에서 그 이름에 갈마(磨)와 비녀차(叉) 를 합쳐 마차산이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른다는 전설이 있다.

 

간파리에는 옛날 마차산에서 딴 복숭아로 남편 목숨을 구했다는 아내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시부모에 대한 공경도 대단했다는 이 아내는 중병에 걸려 죽음에 임박한 남편 목숨을 살리기 위해 약재를 구하려고 엄동설한에 마차산을 며칠 동안 헤매다가 산신령의 현몽으로 복숭아 세 개를 구해 남편에게 달여 먹여 중병이 완쾌되었다. 이 정성어린 이야기가 조정에 알려져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린 열녀 청풍김씨 지문(烈女淸風金氏之門)이 간파리 송산골 마을에 지금도 있다.

 

마차산의 찬가

 

마주보는 소요산 그늘에 가려

유순한  마차 산 찾는 이 없고

호젓한 오솔길 찾아 갈 적에

산 까치 소쩍새 마중 나오고

앙증맞은 참나리 반겨 주는데

노송이 자리 잡은 암반위에는

세상사 모든 근심 날아간다네.

 

열려 효부 청풍김씨 부모공경 지성으로

서방님의 병구완에 바위벼랑 헤매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 복숭아가 명약으로

남편구한 공덕으로 나라님이 내려주신

정문은 가문의 영광이다.

 

원효대사 요석공주 사랑 놀음도

알곡 같은 숨은 진주 가슴에 안고

조용히 살아가는 마차산만 못하다네.

 

마차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산줄기는 전망대 바위와 상석바위가 있어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과 암릉미가 일품이다. 댕댕이 고개로 내려서는 하산 로는 소요산과 동두천의 시가지를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어려움이 없고, 잠시 잠간이면 밤골재 갈림길에 이른다. 동쪽으로 계곡을 내려서면 소요산역으로 가는 길이고, 서쪽으로 내려서면 간파리 송산골이 된다.

 

북쪽으로 보이는 431봉에 올라서면 간파리로 내려가는 하산로 갈림길이 되지만 이곳에서 감악지맥의 또 한줄기인 도감포로 가는 분기점이 된다. 청산리 쪽의 지맥은 동북 방향으로 완만하고 편안한 능선을 따라 지맥이 이어진다. 중간 중간 소요산역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지나 양원리 고개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지맥은 북쪽으로 선회하고 곧 이어 안내간판이 있는 갈림길에는 마차산 정상 3.3km 봉암 광산 1.2km의 이정표가 있다. 참고로 봉암 광산에서는 화장품이나 유리의 원료가 되는 규석을 채굴한다고 한다. 봉암광산의 흉물스런 모습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진행하는 지맥은 시원하게 터지는 조망으로 편안한 산행이 이어진다. 30여 분 후에는 동쪽의 승전교와 서쪽의 양원리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산등성이를 따라 북쪽으로 한탄강임도 갈림길까지 동행을 한다.

 

하봉암동과 초성리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산이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산맥이 지금 걸어가는 능선이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 것 같이 급경사의 산위에 임도까지 개설이 되고 편안한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412봉의 구정산은 군부대의 주둔지 흔적이 남아있고 곧이어 삼각점이 있는 409봉을 내려서면 다시 임도와 동행을 한다.

 

거송산악회에서 세운 *九政山 山神地位*는 위치상으로 보아 군부대가 정상에 있을 때 접근하기가 어려운 관계로 이곳에 제단을 만든 것으로 추측을 해본다. 잡목사이로 한탄강과 전곡시내가 내려다보이고 왕방지맥과 소요지맥의 끝자락이 시야에 들어온다. 군 비상도로 갈림길도 끝이 나고 무성한 잡목을 헤치며 한탄강의 절벽이 있는 곳까지 진행하면 그림 같은 한탄강이 소나무그늘 사이로 펼쳐진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발품을 팔아가며 답사를 하는 보람을 남들이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우측의 군 벙커로 내려서는 계단길이 3번 국도와 만나며 건너다보이는 신천과의 합수지점이 지맥의 종착점이다.

 

한탄강: 길이는 134.5㎞이다. 강원도 평강군 상송관리, 장암산(長巖山:1,052m) 남쪽 계곡에서 발원해 김화군과의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흘러 휴전선을 지나 남대천(南大川)과 합류한다. 유로를 남서쪽으로 바꾸어 영평천(永平川)·차탄천(車灘川)을 차례로 합치고, 연천군 미산면과 전곡읍 도감포 사이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크다·넓다·높다'는 뜻의 '한'과 '여울·강·개'의 뜻인 '탄'이 어울린 순수한 우리말이며, 이를 한문으로 음차한 것이다.

 

추가령구조곡의 열하에서 분출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용암대지는 평강·철원에서 임진강과의 합류점까지 뻗어 있다. 곳곳에 수직절벽과 협곡이 발달했고, 휴전선에 가까워 이들 수직단애의 골짜기는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이용되고 있다. 옛날 후고구려의 궁예가 도읍을 정하기도 했던 한탄강 유역에는 6·25전쟁 때 평강·철원·김화를 연결하는 철의 삼각지를 비롯해 백마고지, 단장의 능선, 김일성고지 등의 격전지와 제2땅굴, 38선경계비, 승일교, 만세교, 김일성별장, 필리핀군 참전기념탑 등 분단의 아픔을 실감하게 하는 전적비와 전적기념물이 많다. 또한 유역 내에는 한탄강유원지, 남대천유원지, 직탕폭포, 삼부연폭포, 재인폭포, 매월대, 철원8경, 고석정 및 순담(강원도 기념물 제8호) 등 자연경관이 빼어난 경승지가 많다.

출처 : 풍운아
글쓴이 : 풍운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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